카를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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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카를 4세는 1316년 보헤미아 프라하에서 태어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보헤미아 왕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교육받으며 5개 국어를 구사했고,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정치적,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1346년 대립왕으로 선출된 후, 1347년 보헤미아 왕으로 즉위했으며, 흑사병이 창궐하지 않았던 프라하를 제국 수도로 삼고 도시를 재건했다. 그는 프라하 카렐 대학교를 설립하고 금인칙서를 공포하여 황제 선출 방식을 규정하는 등 신성 로마 제국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통치는 보헤미아의 황금기로 기억되며, 현재 체코에서는 '조국의 아버지'로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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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4세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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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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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카를 4세 |
로마자 표기 | Karl IV |
체코어 표기 | Karel IV |
독일어 표기 | Karl IV |
라틴어 표기 | Carolus IV |
출생일 | 1316년 5월 14일 |
출생지 | 프라하, 보헤미아 왕국 |
사망일 | 1378년 11월 29일 (향년 62세) |
사망지 | 프라하, 보헤미아 왕국 |
매장지 | 프라하, 성 비투스 대성당 |
왕가 | 룩셈부르크 가문 |
아버지 | 얀 |
어머니 | 엘리슈카 |
통치 | |
신성 로마 황제 | 신성 로마 황제 |
신성 로마 황제 즉위 | 1355년 ~ 1378년 11월 29일 |
신성 로마 황제 선임자 | 루트비히 4세 |
신성 로마 황제 계승자 | 지기스문트 |
이탈리아 왕 | 이탈리아 왕국 |
이탈리아 왕 즉위 | 1355년 ~ 1378년 11월 29일 |
로마 왕 | 로마 왕 |
독일 왕 | 독일 왕 |
로마 왕 즉위 | 1346년 7월 11일 ~ 1378년 11월 29일 |
로마 왕 선임자 | 루트비히 4세 |
로마 왕 계승자 | 벤첼 |
보헤미아 왕 | 보헤미아 왕국 |
보헤미아 왕 즉위 | 1346년 8월 26일 ~ 1378년 11월 29일 |
보헤미아 왕 선임자 | 얀 |
보헤미아 왕 계승자 | 벤첼 |
룩셈부르크 백작 | 룩셈부르크 백작 |
룩셈부르크 백작 재위 | 1346년 ~ 1353년 |
룩셈부르크 백작 선임자 | 얀 |
룩셈부르크 백작 계승자 | 벤첼 1세 |
대관식 | |
이탈리아 왕 대관식 | 1355년 1월 6일, 밀라노 |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 | 1355년 4월 5일, 로마 |
로마 왕 대관식 | 1346년 11월 26일, 본 |
보헤미아 왕 대관식 | 1347년 9월 2일, 프라하 |
가족 | |
배우자 | 블랑슈 드 발루아 (1329년 결혼, 1348년 사망) 안나 폰 데어 팔츠 (1349년 결혼, 1353년 사망) 안나 시비드니츠카 (1353년 결혼, 1362년 사망) 엘리자베트 폰 포메른 (1363년 결혼) |
자녀 | 마르가레테 (헝가리 왕비) 카타리나 (오스트리아 공작 부인, 바이에른 공작 부인) 엘리자베트 (오스트리아 공작 부인) 벤첼 (보헤미아 왕, 독일 왕) 안나 (잉글랜드 왕비) 지기스문트 (신성 로마 황제) 요한 (괴를리츠 공작) 마르가레테 (뉘른베르크 성백작 부인) |
2. 유년 시절 및 교육
카를 4세는 1316년 5월 14일,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에서 룩셈부르크 왕조의 얀 국왕과 프셰미슬 왕조의 엘리슈카 프르셰미슬로브나 사이의 장남으로 태어났다.[21] 그의 어머니 엘리슈카는 프셰미슬 왕조 마지막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3세의 여동생이었다.
카를의 본명은 외할아버지인 보헤미아의 바츨라프 2세 국왕의 이름을 딴 '''바츨라프'''(Václavcs, Wenzel|벤첼de)였다. 그러나 7세부터 7년간 프랑스 궁정에서 생활하며 교육을 받았고, 이때 고모 마리 드 룩셈부르크의 남편이자 자신의 대부였던 프랑스 국왕 샤를 4세를 기리는 견진성사에서 이름을 '''카를'''(독일어: Karl, 체코어: Karel)로 바꾸었다.[5] 프랑스에서의 교육과 경험을 통해 그는 라틴어, 체코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등 5개 언어에 능통한 교양 있는 군주로 성장했다.[6][22]
1331년에는 아버지 얀 국왕을 따라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하여 정치 및 군사 경험을 쌓았고, 토스카나 루카의 지배자를 맡아 1333년 몬테카를로 요새를 건설하기도 했다.[7]
1333년, 시력이 약해진 아버지 얀 국왕을 대신하여 보헤미아 왕국의 통치자로 활동하기 시작했으며, 1334년에는 모라바 변경백 칭호를 받았고 1336년에는 티롤 정부 수반으로 임명되었다.
2. 1. 프랑스 궁정 생활
본래 이름이 바츨라프였던 카를 4세는 정치에 관여했던 부모의 불화로 3살 때 어머니 곁에서 떨어져[21] 로케트 성에 유폐되었다가, 7세부터 14세까지는 파리의 궁정에서 양육되었다. 이는 아버지 얀 국왕의 여동생인 고모 마리 드 룩셈부르크가 당시 프랑스 국왕 샤를 4세의 왕비였기 때문이다. 카를 4세는 프랑스 궁정에서 7년 동안 거주하면서 프랑스식 교육을 받았다.카를 4세는 자서전에서 고모부인 샤를 4세에 대해 "왕 자신은 라틴어 지식이 없었지만, 라틴어 기초를 배우게 하기 위해 궁정 사제를 가정교사로 붙여주셨다"라고 기록했다.[22] 이때의 교사는 프랑스 귀족 출신의 피에르 로제였는데, 그는 훗날 교황 클레멘스 6세가 된다. 피에르 로제는 어린 카를에게 라틴어와 신학, 그리고 군주학을 가르쳤다.[23][24] 이러한 훌륭한 교육 덕분에 카를은 세련되고 교양 있는 젊은이로 성장했으며,[22] 이는 훗날 그가 로마 황제로 선출되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23]
파리 체류 기간 동안, 그는 대부이기도 한 고모부 샤를 4세를 기리는 견진성사에서 자신의 이름을 바츨라프에서 카를(독일어: Karl, 체코어: Karel)로 개명했다. 또한 1329년에는 프랑스 왕족 발루아 백작 샤를의 딸이자 샤를 4세의 사촌인 블랑슈 드 발루아를 첫 번째 아내로 맞이했다. 블랑슈는 발루아 왕조의 초대 국왕인 필리프 6세의 이복 여동생이기도 하다.
프랑스 궁정에서의 생활과 교육을 통해 카를 4세는 라틴어, 체코어,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5개 언어에 능통하게 되었다.[21]
2. 2. 이탈리아 원정 경험
1330년, 카를은 파리를 떠나 1331년부터 아버지 얀 국왕과 함께 2년간 이탈리아 원정에 참여했다. 당시 이탈리아는 교황청이 아비뇽으로 이전한 후[25], 강력한 황제의 통치를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면서 교황파와 황제파의 대립이 다시 격화되고 있었다.[21][26]카를은 이 원정 기간 동안 밀라노를 지배하던 비스콘티 가문에게 독살당할 뻔한 위기를 겪기도 했고, 메디치 가문이 이끄는 피렌체 공화국과의 전투를 직접 지휘하며 정치적, 군사적 경험을 쌓았다. 또한, 예술가 및 문인들과 교류하며 르네상스 초기의 인문주의를 접하게 되었다. 특히 "최초의 인문주의자"로 불리는 이탈리아 시인 페트라르카는 젊은 카를에게 기대를 걸었던 인물 중 하나였다.[21][27]
1333년 초, 카를은 토스카나의 루카로 가서 그곳의 통치를 강화하는 임무를 맡아 지배자를 역임했다. 도시 방어를 위해 인근에 요새와 함께 "카를의 산"이라는 뜻의 몬테카를로 마을을 건설했다.[7]
이탈리아에서의 경험은 카를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체코어, 라틴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하게 되었으며,[21] 라틴어로 자서전을 쓸 정도로 당대 유럽 군주 중 가장 뛰어난 교양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부르크하르트에 따르면, 카를은 피사에서 피렌체의 학자 자노비 데라 스트라다에게 월계관을 수여했는데, 이는 고대 로마 황제의 관례를 따른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후 이탈리아 순행 중 여러 시인에게 월계관을 수여하는 관행이 생겨났다고 한다.[51] 부르크하르트는 카를이 "아름다운 풍경에 대해 매우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역사가의 평가를 인용하기도 했다.[52]
3. 보헤미아 통치
1333년, 17세의 카를은 보헤미아로 돌아와 아버지 얀 국왕을 대신하여 통치를 시작했으며, 1334년 모라비아 변경백이 되었다.[21] 1340년부터는 시력을 잃은 아버지를 대신해 실질적으로 보헤미아를 다스렸다. 이러한 통치 경험은 그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 밑거름이 되었다.[21]
1346년 크레시 전투에서 아버지 얀 국왕이 전사하자, 카를은 보헤미아 왕위와 룩셈부르크 백작 지위를 계승했다. 1347년 9월 2일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국왕(카렐 1세)으로 공식 즉위했으며, 같은 해 10월 경쟁자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하면서 신성 로마 제국의 유일한 로마왕으로서의 입지도 확보했다.
카를 4세는 흑사병의 영향이 비교적 적었던 프라하를 신성 로마 제국과 보헤미아의 수도로 삼고 도시 발전에 힘썼다. 그는 실레시아, 오버팔츠, 프랑켄 지역을 보헤미아 왕국의 영토로 편입시켜 왕국의 영향력을 확대했다. 1353년에는 이복동생 벤첼 1세에게 룩셈부르크 백작위를 넘겨주었다. 1355년에는 보헤미아 법률인 《마이에스타스 카롤리나》(Maiestas Carolina) 제정을 시도했으나 보헤미아 의회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3. 1. 프라하 발전
1333년, 17세가 된 카를은 보헤미아로 돌아와 부재중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카렐 왕자로서 보헤미아와 그 속국인 모라비아의 통치를 맡았다.[21]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의 언덕 위, 프라하 성 성벽 안에 위치한 성 비투스 대성당이 고딕 양식으로 건설되기 시작한 것은 카렐의 왕자 시대였던 1344년 11월의 일이다. 대성당 건설을 위해 북프랑스 아라스 출신의 건축가 마테유(마티아)가 초청되었다.[28][29] 이와 함께 프라하의 주교는 기존에 마인츠 대주교좌에 속해 있었으나, 독립된 대주교(프라하 대주교좌)로 승격되었다.[30] 왕자 시절 13년간의 보헤미아 통치 경험은 훗날 그가 왕위를 순조롭게 계승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21]1348년 4월, 로마 왕이 된 카를 4세는 프라하를 단순히 보헤미아의 수도를 넘어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대대적으로 정비할 계획을 선언했다. 이 계획의 일환으로 그는 프라하 대학교(현재의 카렐 대학교) 설립을 명령했다.[34] 이는 라인 강 동쪽, 알프스 이북 지역에 세워진 최초의 대학교였다.[34] 당시 제국 내 젊은이들은 학문을 배우기 위해 파리나 볼로냐 등 먼 곳으로 유학을 가야만 했다. 파리에서 교육받은 경험이 있는 카를 4세는 이러한 상황을 개선하고 프라하를 "동방의 파리"로 만들고자 했다.[34] 대학 설립은 제국 운영에 필요한 관료를 양성하려는 목적도 있었다.[23] 이로 인해 프라하는 중앙 유럽의 학문 중심지로 번영하며 유럽의 주요 문화 도시 중 하나로 발전했고, 프라하 대학교는 훗날 종교 개혁가 얀 후스와 같은 인물들을 배출했다. 프라하 구시청사 역시 카를 4세 시대에 건설되었다.
1348년은 유럽 전역에 흑사병(페스트)이 크게 유행한 해이기도 하다. 카를 4세는 제국 내 유대인 박해를 적극적으로 막지 못했으며, 남부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는 유대인 거주지와 회당을 철거한 자리에 성모 교회(현재의 프라우엔 교회) 건설을 허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보헤미아 왕으로서는 프라하 신시가지 확장 과정에서 유대인 이민을 환영하고 관련 법령에서 이민자 중 유대인을 우선적으로 언급하는 등 상반된 모습을 보였다.[35] 다행히 프라하는 흑사병 피해가 비교적 적었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나 박해도 거의 일어나지 않았다.

카를 4세는 프라하를 제국의 수도로 건설하는 동시에 상공업을 장려하며 보헤미아의 위상을 높이고자 했다.[48]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여러 건축물과 장소를 남겼다. 대표적으로 체코의 카를슈타인 성은 그가 황제가 된 1348년 프라하 남서쪽 교외의 바위산 위에 건설하기 시작한 성으로, 신성 로마 제국의 왕관과 보물을 보관하기 위해 지어졌다.[22] 현재는 많은 관광객이 찾는 명소이다. 이 외에도 세계적인 온천 휴양지로 유명한 보헤미아 서부의 카를로비 바리(독일명 카를스바트)[21]와 블타바 강을 가로지르는 프라하의 카를교[28][49] 등도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카를 4세의 통치 아래 수도 프라하는 중·동유럽 교역망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고 문화적으로도 크게 번영하여, 당시 남슬라브 지역의 제후들로부터 "황금의 프라하"라고 불릴 정도였다.[28][50] 이 시기 프라하의 발전은 제국의 정치적 중심을 동쪽으로 이동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3. 2. 보헤미아 왕위 계승
1306년, 프셰미슬가의 마지막 보헤미아 국왕 바츨라프 3세가 암살되면서 남성 후계자가 단절되었다.[20]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보헤미아의 유력 귀족들은 로마 황제 하인리히 7세의 아들인 룩셈부르크가의 얀을 새로운 국왕으로 선택했다. 1310년, 얀은 바츨라프 3세의 여동생 엘리슈카 프셰미슬로브나와 결혼하여 보헤미아 국왕이 되었고[21], 이들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 바로 카를이다. 카를의 원래 이름은 외할아버지와 삼촌의 이름을 딴 바츨라프(체코어: Václav)였다.1333년, 17세가 된 카를은 보헤미아로 돌아와 자주 자리를 비우는 아버지 얀 국왕을 대신하여 보헤미아와 그 속령인 모라비아의 통치를 맡았다. 1334년에는 모라비아 변경백이 되었고, 1340년부터는 시력을 잃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실질적으로 보헤미아를 통치했다. 왕자 시절 13년에 걸친 보헤미아 통치 경험은 훗날 그가 왕위를 계승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21]
1346년, 백년 전쟁 중 크레시 전투에 아버지 얀 국왕과 함께 프랑스 측으로 참전했다. 이 전투에서 아버지 얀 국왕은 전사했고, 카를은 부상을 입었지만 살아남아 보헤미아 왕위와 룩셈부르크 백작 지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이듬해인 1347년 9월 2일, 카를은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국왕 대관식을 거행하며 공식적으로 보헤미아의 통치자(보헤미아 국왕 카를)가 되었다. 같은 해 10월 11일,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하면서, 카를 4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유일한 로마왕이 되어 독일에서의 입지도 강화하게 되었다.
4. 로마 왕
1346년 7월 11일, 신성 로마 제국의 루트비히 4세 황제와 대립하던 교황 클레멘스 6세와 동맹을 맺었다. 카를은 클레멘스 6세의 지지를 받아 일부 선제후들에 의해 렌스에서 루트비히 4세에 대항하는 대립왕(반왕)으로 선출되었다.[11] 그는 과거 스승이기도 했던 교황에게 상당한 양보를 약속했는데, 교황령의 소유권을 확인하고 이탈리아 문제 불간섭, 교회 수호 등을 약속했다.[11][32]
선거 군주제로 선출된 카를은 독일 내 입지가 약했고, 교황에게 종속적인 태도 때문에 '성직자왕'(Pfaffenkönig) 또는 "스님 왕"이라는 조롱 섞인 별명으로 불렸다.[31] 많은 주교와 제국 도시들은 여전히 루트비히 4세를 지지했다. 같은 해 8월 백년 전쟁의 크레시 전투에서는 아버지 얀 국왕과 함께 프랑스 측으로 참전했으나, 아버지는 전사하고 카를은 부상을 입고 탈출했다. 이 전투로 그는 보헤미아 왕위와 룩셈부르크 백작 지위를 계승하게 되었다.
1347년 10월 11일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하면서[11] 카를은 신성 로마 제국의 유일한 로마왕이 되었다. 1349년 비텔스바흐 가문이 귄터 폰 슈바르츠부르크를 대립왕으로 내세우려 했으나 지지 기반 확보에 실패하고 카를에게 패배하면서[11] 그의 왕위는 더욱 공고해졌다.
독일 내 기반이 약했던 카를 4세는 우선 본거지인 보헤미아 강화에 힘썼다.[21] 1347년 9월 2일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국왕으로 즉위했다. 그는 흑사병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은 프라하를 신성 로마 제국과 보헤미아의 수도로 삼고, 파리를 모델로 도시를 재건하여 노베메스토(Nové Město, 신시가지)를 건설했다. 1348년에는 중앙유럽 최초의 대학인 프라하 카렐 대학교를 설립하여[11] 프라하를 중앙유럽의 문화 및 교육 중심지로 발전시켰다.
이후 카를 4세는 독일 내 지위 확보에도 나서, 1349년 6월 17일 프랑크푸르트에서 다시 로마왕으로 선출되고 7월 25일 아헨에서 대관식을 치렀다.[11] 그는 선물, 약속, 결혼 동맹 등을 통해 라인란트와 슈바벤 도시들,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지를 확보했다. 1348년 안나와의 결혼은 라인 팔라티나트 백작이자 바이에른 공작인 루돌프 2세와의 동맹으로 이어졌다.[11]
카를 4세는 실레시아, 오버팔츠, 프랑켄 지역의 영지를 확보하여 보헤미아 왕령("신 보헤미아")을 확장하고자 했다.[11] 1353년에는 이복동생 벤첼 1세에게 룩셈부르크 백작위를 넘겨주었다. 1355년 보헤미아 법률인 《마이에스타스 카롤리나》(Maiestas Carolina)를 제정하려 했으나 귀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1] 1350년에는 로마의 호민관 콜라 디 리엔초가 프라하를 방문하여 이탈리아 행을 촉구했으나, 카를은 그를 투옥시킨 뒤 아비뇽의 교황에게 넘겼다.[11][8]
4. 1. 흑사병과 유대인 박해
1348년은 전 유럽에서 흑사병(페스트)이 창궐한 해였다. 이 시기 카를 4세는 제국 내에서 벌어진 유대인 박해를 막지 못했으며, 남부 독일의 뉘른베르크에서는 유대인 가옥과 회당을 철거한 자리에 성모 교회(현재의 프라우엔 교회) 건설을 허가하기도 했다.한편, 보헤미아의 왕으로서는 다른 태도를 보였다. 그는 확장된 프라하 신시가지로의 이민자로 유대교도를 환영했으며, 관련 법령에서도 이민자의 첫머리에 유대인을 내세웠다. 이러한 그의 태도에는 이중성이 인정된다.[35] 당시 프라하에서는 페스트 감염 사례 자체가 적었고, 유대인에 대한 차별이나 박해도 일어나지 않았다.
5. 신성 로마 제국 황제
1346년, 당시 보헤미아 왕자였던 카를은 비텔스바흐 가문의 루트비히 4세 황제와 대립하던 교황 클레멘스 6세의 지지를 받아 대립 로마왕으로 추대되었다. 클레멘스 6세는 과거 카를의 스승이었으며, 일부 제후들은 루트비히 4세의 강압적인 영토 확장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카를의 대숙부인 트리어 대주교 발두인 폰 룩셈부르크를 포함한 일부 선제후들은 카를을 로마 왕으로 선출하고 루트비히 4세의 폐위를 선언했다.
그러나 카를은 교황청의 요구를 대부분 수용하여 황제의 권한을 축소하려 했기 때문에, 제국 내에서 "스님 왕"이라 불리며 경멸받기도 했다.[31][32] 그의 로마 왕 대관식은 1346년 아헨이 아닌 본에서 간소하게 치러졌다. 같은 해, 카를은 아버지 보헤미아의 얀과 함께 백년 전쟁에 참전하여 프랑스 왕국 편에서 싸웠다. 아버지가 크레시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카를은 보헤미아 왕위와 룩셈부르크 백작위를 계승했다.
1347년 카를은 프라하에서 보헤미아 왕 대관식을 치렀고, 같은 해 루트비히 4세가 사망하면서 유일한 로마 왕이 되었다. 비록 일부 반대 세력이 존재했지만, 카를 4세는 우선 자신의 기반인 보헤미아 통치에 집중했다.[21] 1353년에는 룩셈부르크 백작령을 이복동생 벤체슬라스 1세에게 넘겨주고 작위를 공작으로 승격시켰다.[36]
1354년 카를 4세는 군대 없이 알프스산맥을 넘어 이탈리아로 향했다. 1355년 1월 6일 밀라노의 산탐브로조 대성당에서 랑고바르드의 철관을 받으며 이탈리아 왕으로 즉위했고, 같은 해 4월 5일 로마에서 추기경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 황제로 즉위했다.[9][11] 그의 주된 목표는 교황과의 약속대로 평화롭게 황제관을 얻는 것이었기에, 로마 시민들의 바람에도 불구하고 즉위 당일 로마를 떠났다. 그는 이탈리아에서의 모든 황제 권리를 사실상 포기하고 프라하로 귀환했는데, 이 과정에서 페트라르카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10][11]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그의 이탈리아 정책을 "가장 부끄러운 정치적 희극 중 하나"라고 평가했다.[38] 하지만 이를 통해 카를 4세는 교황청의 간섭을 배제하고 황제 선출의 독립성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다.[37]
귀환 후 카를 4세는 흑사병의 여파에서 회복 중이던 제국 행정에 힘썼다. 1356년에는 제국의 기본법인 금인칙서를 공포하여 황제 선출 방식을 명확히 규정하고 교황의 개입 없이 선거가 이루어지도록 했다.[11] 이는 제국의 정치적 안정을 가져오는 데 기여했지만, 동시에 선제후들의 권한을 강화시켜 영방 국가들의 자립화를 촉진하는 결과를 낳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금인칙서(1356년) 문단 참고'')
카를 4세는 룩셈부르크 가문의 세력 확장에도 힘썼다. 이복동생 벤체슬라스에게 룩셈부르크 공국을, 다른 동생 요한 하인리히에게는 모라비아를 주었으며, 자신은 오버팔츠 일부(1353년), 니더라우지츠(1367년) 등을 확보하고, 티롤과 상바이에른의 계승권 약속을 받아냈다. 특히 1373년에는 비텔스바흐 가문과의 분쟁 끝에 브란덴부르크 변경백국을 획득하여 아들 바츨라프 4세에게 넘겨주었다.[11] (''자세한 내용은 영토 확장 문단 참고'')
1365년에는 아를에서 부르군트의 군주로 즉위했다.[11] 1368년에는 두 번째로 이탈리아를 방문하여 비테르보에서 교황 우르바노 5세를 만났으나, 별다른 성과 없이 1369년 말 이전에 귀환했다. 말년에는 1376년 아들 바츨라프 4세가 로마왕으로 선출되도록 힘썼고, 1378년에는 슈바벤 도시 동맹과 귀족들 간의 평화를 중재하는 데 노력했다.[11]
카를 4세는 만년에 통풍(대사성 관절염)으로 고생했으며,[11] 1378년 11월 프라하에서 사망하여 그곳에 묻혔다. 1848년 프라하에는 그의 동상이 세워졌다.[11] 체코의 카를교, 온천 도시 카를로비바리, 프라하 카렐 대학교 등 많은 지명과 기관이 그의 이름에서 유래했다.
5. 1. 금인칙서(1356년)

이탈리아 원정에서 돌아온 카를 4세는 흑사병에서 막 회복되고 있던 신성 로마 제국의 행정에 힘썼고,[11] 제국의 정치 개혁을 활발하게 추진했다. 그는 제국의 최고 법규이자 제국 재건 계획으로 평가받는 금인칙서(Goldne Bulle)를 발표하여 대공위 시대 이후 계속된 제국 내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자 했다. 이 칙서는 1356년 1월 10일 뉘른베르크 제국 의회와 같은 해 12월 25일 메츠 제국 의회에서 각각 승인되었다.
금인칙서는 총 31장으로 구성되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41][42]
- 황제 대관식은 아헨에서 거행한다.
- 황제 선출은 교황의 인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이는 서임권 투쟁 이후 지속된 교황의 간섭에서 벗어나 황제 선출의 독립성을 확보하려는 조치였다.
- 황제 선출권은 7명의 선제후가 독점한다.
7선제후는 다음과 같다.
금인칙서는 선제후의 지위와 권리, 선거 방식 등을 명확히 규정하여 황제 선출을 둘러싼 분쟁과 대립왕 출현 가능성을 크게 줄였다. 그러나 동시에 선제후에게 제국의 고위 관직[43]뿐만 아니라 재판권, 광산 채굴권, 관세 징수권, 화폐 주조권, 유대인 보호권 등 사실상 독립 군주에 버금가는 강력한 특권을 부여했다.[40] 이로 인해 제국은 일시적인 안정기를 맞이했지만, 선제후를 비롯한 제후들의 권한이 강화되면서 신성 로마 제국 내 영방 국가들의 자립화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40] 금인칙서는 나폴레옹 전쟁으로 1806년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될 때까지 약 450년간 제국의 기본법으로서 효력을 유지했다.
5. 2. 영토 확장
황금칙서 발포 이후 카를 4세는 가문의 영토를 넓히는 정책을 더욱 적극적으로 펼쳐 왕권의 기반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특히 본거지인 보헤미아 경영에 전념하여 광산 개발과 교통로 정비 등을 실시한 외에, 보헤미아 왕국의 영토 확장에도 힘썼다.카를 4세가 확장한 주요 영토는 다음과 같다.
획득 지역 | 획득 방식 | 관련 인물/사건 |
---|---|---|
오버팔츠 | 장인 유산 계승[28][44] | - |
니더루지츠 | 장인 유산 계승[28][44] | - |
실레시아 | 결혼[28][44] | 안나 슈비드니츠카 |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 | 매입[28][44] | 바이에른 공작 오토 5세 |
1365년, 세 번째 부인 안나 슈비드니츠카가 사망하자, 카를 4세는 폴란드 왕가인 피아스트 왕조의 피를 이은 엘리자베트 폰 폼머른과 재혼하였다. 이를 통해 폼머른과 폴란드 등 북방으로 영토를 확장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했다.
5. 3. 보헤미아 법률 제정 시도 (실패)
1356년 금인칙서를 공포한 것과 비슷한 시기에, 카를 4세는 자신이 다스리는 영지 중 핵심인 보헤미아에서 보헤미아 왕 카렐 1세로서 법률 제정을 시도했다. 그는 '마예스타스 카롤리나'라고 불리는 칙서를 만들어, 신성 로마 제국에서 공포한 금인칙서보다 더 강력하게 보헤미아 왕국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고 왕의 권한을 강화하고자 했다. 하지만 이 계획은 보헤미아 귀족들의 강한 반대에 부딪혀 결국 실행되지 못했다.[17]6. 말년 및 사망
1375년, 카를 4세는 뤼벡을 중심으로 한 한자 동맹의 무역 독점권을 인정했다.[45][46] 한자 동맹은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가 발트해와 북해 무역을 독점하려 하자, 이에 반발한 여러 도시들이 결성한 경제 공동체였다. 함부르크, 쾰른, 브레멘, 단치히 등이 주요 가맹 도시였으며, 전성기에는 200개가 넘는 도시가 참여했다.
이듬해인 1376년에는 새로운 "슈바벤 도시 동맹" 결성을 허가했다.[47] 일설에 따르면 이는 황위 세습을 위한 자금 마련 목적이었다고 하나, 스스로 제정한 금인칙서의 규정을 어기고 도시 동맹을 허가한 것은 제후들의 반발을 사기도 했다.[47]
카를 4세는 말년에 후계 구도를 공고히 하는 데 힘썼다. 장남 벤체슬라스에게 브란덴부르크 변경백령을 넘겨주고, 1376년에는 그를 로마 왕으로 선출시켜 황제 세습의 길을 열었다. 또한 차남 지기스문트와 헝가리의 왕위 계승자인 여왕 마리아의 결혼을 성사시켜 동방 지역의 안정을 도모하고 헝가리 왕국 확보의 기반을 마련했다.[23][44]
외교적으로는 프랑스, 폴란드와의 국경 문제를 해결했으며, 1377년에는 교황의 아비뇽 체류를 종식시키고 교황 그레고리우스 11세가 로마로 귀환하도록 하는 데 기여했다. 이는 카를 4세 개인의 명성을 높였을 뿐 아니라 신성 로마 제국의 국제적 위상을 향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처럼 다양한 방법을 통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고 제국의 안정을 꾀하던 카를 4세는 1378년 11월 29일, 6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했다.
7. 가족 관계
카를은 네 번 결혼했다.
첫 번째 부인은 발루아의 블랑슈(1316년 ~ 1348년 8월 1일)로, 발루아 백작 샤를의 딸이자 프랑스 왕 필리프 6세의 이복동생이었다. 1329년에 결혼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 아들 (1334년 출생) - 요절.
- 마르가레테 (1335년 ~ 1349년) - 헝가리 왕 라요시 1세와 결혼했다.
- 카타리나 (1342년 ~ 1395년) - 오스트리아 공작 루돌프 4세와 결혼했고, 사별 후 바이에른 공작 겸 브란덴부르크 변경백 오토 5세와 재혼했다.
두 번째 부인은 안나 폰 데어 팔츠(1329년 9월 26일 ~ 1353년 2월 2일)로, 라인 궁중백 루돌프 2세의 딸이었다. 1349년 3월에 결혼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한 명의 아들이 있었다.
- 벤체슬라스 (1350년 ~ 1351년) - 요절.
세 번째 부인은 안나 시비드니츠카(1339년 ~ 1362년 7월 11일)로, 실레시아의 시비드니차 공작 헨리크 2세와 헝가리의 카타리나(헝가리 왕 카로이 1세 로베르트의 딸)의 딸이었다. 1353년 5월 27일에 결혼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세 명의 자녀가 있었다.
- 엘리자베트 (1358년 4월 19일 ~ 1373년 9월 4일) - 8살의 나이에 오스트리아 공작 알브레히트 3세(루돌프 4세의 동생)와 결혼했고 15세에 자녀 없이 사망했다.
- 벤체슬 4세 (1361년 ~ 1419년) - 아버지의 뒤를 이어 로마 왕(독일 왕), 보헤미아 왕,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룩셈부르크 공작이 되었다. 바이에른의 요안나, 바이에른의 소피아와 결혼했다.
- 아들 (1362년 7월 11일 출생 및 사망).
네 번째 부인은 엘리자베트 폰 포메른(1347년경 ~ 1393년 2월 14일)으로, 포메라니아 공작 보기슬라프 5세와 폴란드의 엘리자베트(폴란드 왕 카지미에시 3세의 딸)의 딸이었다. 1363년 5월 21일에 결혼했으며, 두 사람 사이에는 여섯 명의 자녀가 있었다.
- 앤 오브 보헤미아 (1366년 ~ 1394년) - 잉글랜드 왕 리처드 2세와 결혼했다.
- 지기스문트 (1368년 ~ 1437년) - 신성 로마 황제, 보헤미아 왕, 헝가리 왕, 브란덴부르크 선제후, 룩셈부르크 공작이 되었다. 헝가리 왕비 마리아, 칠리의 바르바라와 결혼했다.
- 요한 (1370년 ~ 1396년) - 모라바 변경백이자 괴를리츠 공작. 스웨덴의 알베르트 국왕의 딸 리하르디스 카타리나와 결혼했다. 그의 유일한 딸이자 상속녀는 엘리자베트 폰 괴를리츠이다.
- 카를 (1372년 3월 13일 ~ 1373년 7월 24일) - 요절.
- 마르가레테 (1373년 ~ 1410년) - 뉘른베르크 부르크그라프 요한 3세와 결혼했다.
- 헨리 (1377년 ~ 1378년) - 요절.
카를에게는 1362년 알려지지 않은 여성에게서 태어난 사생아 윌리엄이 있었다. 그는 브라반트에서 자랐으며, 1377년 아버지가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 동행한 것으로 보인다. 카를은 그를 아들로 인정했고, 그가 4촌 이내의 친척과 결혼할 수 있도록 교황청의 특별 허가를 받으려 했다. 그가 결혼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는 보헤미아 친척들을 위해 외교관으로 활동했지만, 그의 최후는 알려지지 않았다.[14]
8. 평가 및 유산
카를 4세의 통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17][47] 그는 중세 후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 중에서도 독특한 통치를 펼친 인물로 평가받는다. 체코에서는 "조국의 아버지"(Otec vlasti|오테츠 블라스티cs)로 불리며 오늘날까지도 높은 존경을 받는다.[22]
그의 치세 동안 수도 프라하는 크게 발전하여 문화적, 경제적 중심지로 번영했으며[28][48][50], 1356년 공포된 황금칙서는 이후 제국의 기본적인 틀을 규정하는 중요한 문서가 되었다.[17] 카를 4세는 또한 당대 유럽에서 손꼽히는 교양과 학식을 갖춘 군주였으며,[21][24] 문화와 예술을 후원했다. 그의 이름은 카를교[28][49], 카를로비 바리[21], 카를슈테인 성[22] 등 여러 장소에 남아있다.
그러나 황금칙서가 제국의 분열을 고착화시켰다는 비판과 함께,[17] 그의 정책이 룩셈부르크 가문의 이익에 지나치게 집중되어 결과적으로 합스부르크 가문의 부상을 도왔다는 평가도 존재한다.[17][47]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카를 4세가 고대 로마 황제의 권위를 모방하여 시인에게 월계관을 수여했으며,[51] "아름다운 풍경에 대해 매우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52]
8. 1. 긍정적 평가
카를 4세의 통치 기간은 신성 로마 제국의 성격 변화를 가져왔으며, 특히 보헤미아의 황금기로 기억된다.[24] 그는 체코인들에게 "조국 아버지(otec vlasti)"로 불리며[22], 이 칭호는 그의 장례식에서 아달베르투스 랑코니스 드 에리치니오가 처음 사용했다. 2005년 체코의 TV 프로그램 ''Největší Čech''에서 1위를 차지할 정도로 오늘날에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정치적으로 카를 4세는 1356년 황금칙서를 공포하여 이후 4세기 동안 유지된 황제 선출 절차를 규정함으로써 제국의 질서를 확립하고 평화를 가져오는 데 기여했다.[17][47] 그는 제국 각 지역을 평화 유지를 위한 연맹으로 조직했으며, 이 과정에서 제국 자유 도시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예를 들어 1370년의 슈바벤 란트프리데 연맹은 거의 전적으로 제국 자유 도시들로 구성되었다. 이러한 연맹은 황제와 그의 대리인들에 의해 조직되고 이끌어졌으며, 참여 도시들은 평화 유지 노력을 위한 특권을 부여받았다. 또한 그는 합스부르크가와의 계승 조약과 브란덴부르크 매입을 통해 제국의 동부 국경에 대한 지배력을 확보하고[17], 프로이센과 리보니아에 대한 황제의 영주권을 주장하는 등 냉철한 현실주의에 기반한 정책을 펼쳤다.[47]
카를 4세 치하에서 프라하는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로서 크게 발전했다. 그의 이름은 카를 대학교(1348년 설립), 카를교, 카를 광장 등 많은 기념물과 기관에 남아 있다.[48] 고딕 양식의 프라하 성과 성 비투스 대성당 일부 건설도 그의 후원으로 이루어졌으며, 건축가 페터 파를러가 참여했다. 프라하에서 수기 그림이 처음으로 꽃피운 것도 그의 통치 시대였다. 그는 또한 뉘른베르크와 깊은 유대 관계를 맺고 52번이나 방문하며 도시의 명성을 높였으며, 1352년에서 1362년 사이에 건설된 뉘른베르크 프라우엔 교회를 후원했다. 그의 통치 아래 수도 프라하는 중·동유럽 교역망의 중심지로 번영하여 "황금의 프라하"로 불렸다.[28][50]
카를 4세는 보헤미아의 경제적, 지적 발전에 힘쓰며 초기 인문주의자들을 장려했다. 그는 페트라르카와 서신을 교환하고 프라하 방문을 초청하기도 했다. 파리에서 성장하고 이탈리아 문인들과 교류한 경험 덕분에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체코어, 라틴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라틴어로 자서전을 저술할 정도로 당대 유럽에서 가장 교양 있는 군주 중 한 명으로 꼽힌다.[21] 평생 신학과 법학에 관심을 가졌고, 검소한 생활과 깊은 신앙심, 방대한 고전 지식을 갖추었다.[24] 그는 금인칙서에서 선제후 후계자들이 독일어 외에 라틴어, 이탈리아어, 체코어를 배우도록 규정하며 국제적 감각을 드러내기도 했다 (비록 실현되지는 못했지만).[17] 그의 궁정에는 유럽 각지의 학자와 예술가들이 모여들어 프라하는 초기 인문주의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보헤미아 민족 문화도 함께 번영했다.[24]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카를 4세가 "아름다운 풍경에 대해 매우 예민한 감각을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52]
카를 4세는 보헤미아 왕국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기여했다. 그는 왕자 시절 건설된 성 비투스 대성당에 "성 바츨라프의 왕관"을 보관하고, 이 왕관 아래 보헤미아, 모라비아, 실레지아, 루지체가 통합된다는 보헤미아 왕관령 개념을 문서화했다.[48] 또한 왕국의 가톨릭 교회를 보호하여 교회와 성직자의 재산을 증대시켰다.[28] 자신의 이름을 딴 카를슈타인 성[22], 온천 도시 카를로비 바리[21] 등은 그의 자부심과 영향력을 보여준다.
8. 2. 부정적 평가
카를 4세의 통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금인칙서는 국왕 선거 시의 혼란을 막아 신성 로마 제국에 질서와 평화를 가져왔다는 긍정적 평가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제국의 영방 분열 체제를 더욱 고착화시켰다는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금인칙서는 선제후의 권한을 크게 강화하여 제국을 지탱하는 기둥으로 삼았고, 영지의 불가분할과 장자 단독 상속, 화폐 주조권 등 국왕 대권을 부여했다.[17] 이를 통해 카를 4세는 제국의 지배 관계 현상을 인정하고 법적 근거를 부여하여 국내 치안을 확립하고자 했다.[47]
그러나 이러한 과정에서 통행세 감면이나 시민권 확대 등 도시의 이익을 위한 조항은 제후들의 반대로 삭제되었고, 특히 제후에 대항할 수 있는 도시 동맹은 국내 평화를 어지럽힌다는 명목으로 금지되었다. 이는 카를 4세가 도시를 보호하기보다는 제후들과 타협했음을 보여준다.[17] 다만, 말년에는 스스로 금인칙서를 위반하고 제후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도시 동맹 인가를 강행하기도 했다.
또한 카를 4세는 황제로서의 지위를 이용하여 자신의 가문, 즉 룩셈부르크 가문의 세력 확대에 집중했다. 금인칙서 반포 이후 그는 가문의 권력 강화 정책에 몰두했으며, 궁극적으로는 룩셈부르크 가문이 황제위를 사실상 세습하도록 만들고자 했다.[17][47] 하지만 그의 아들들인 벤첼과 지기스문트는 아버지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고 후계자를 남기지 못해, 결국 보헤미아 왕위와 신성 로마 제국 황제위는 룩셈부르크 가문의 손을 떠나게 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모든 것은 카를 4세가 경쟁자로 여겼던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돌아갔고, 결과적으로 그의 정책은 1438년부터 시작되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제위 세습화와 중앙 유럽 지배, 즉 '합스부르크 제국'의 기반을 마련해 준 셈이 되었다.[17][47]
8. 3. 종합적 평가
카를 4세의 통치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린다.[17][47] 그는 중세 후기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 중에서도 독특한 통치를 펼친 인물로 여겨진다. 그의 치세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성격은 변화했으며, 특히 보헤미아는 황금기를 맞이했다. 이 때문에 체코인들은 그를 종종 "Otec vlasti|오테츠 블라스티cs"라고 부르며,[22] 2005년 체코 공영 방송의 ''Největší Čech''(가장 위대한 체코인)이라는 프로그램에서 1위로 선정되기도 했다.1356년 공포한 황금칙서는 그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유산 중 하나이다. 이 칙서는 이후 약 4세기 동안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 선출 방식을 규정하여, 선거 과정에서 대립왕이 난립하는 혼란을 줄이고 제국에 어느 정도 질서를 가져왔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는다.[17] 금인칙서는 선제후의 지위를 크게 강화했는데, 선제후 영지의 불가분성과 장자 상속 원칙을 확립하고 화폐 주조권 등 국왕 대권을 부여했다. 또한, 선제후들이 정기적으로 회의를 열어 제국 전체의 정치를 논의하도록 함으로써, 제국은 국왕과 선제후 회의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운영되는 구조를 갖추게 되었다.[17] 카를 4세는 제국 내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지역별 연맹(Landfrieden) 결성을 장려했으며, 이 과정에서 제국 자유 도시들이 중요한 역할을 하도록 유도했다. 대표적인 예가 1370년 결성된 슈바벤 란트프리데 연맹이다.
하지만 금인칙서는 다른 한편으로 선제후들의 권력을 지나치게 강화하여 제국의 분권적인 영방 체제를 더욱 공고히 했다는 비판도 받는다.[17] 도시의 이익 증진(통행세 감면, 시민권 확대 등)을 위한 조항들은 제후들의 반대로 인해 포함되지 못했으며, 특히 제후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도시들의 독자적인 동맹 결성은 국내 평화를 해친다는 명목으로 금지되었다. 이는 카를 4세가 도시 세력을 활용하려는 의도가 있었더라도, 결국 제후들과의 현실적인 타협에 그쳤음을 보여준다.[17] 다만 그는 말년에 스스로 금인칙서의 규정을 어기면서까지 도시 동맹을 승인하려 시도하기도 했다.
카를 4세는 냉철한 현실주의자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는 당시 신성 로마 제국의 복잡한 지배 관계 현실을 인정하고 이를 법적으로 제도화함으로써 제국 내 치안을 안정시키고 페데(사적인 전쟁)를 일시적으로나마 종식시키는 성과를 거두었다.[47][53]
문화적으로 카를 4세는 프라하를 제국의 실질적인 수도로 만들고 대대적인 발전을 이끌었다. 그는 아버지 얀이 시작한 성 비투스 대성당 건설을 이어받았고, 카를교, 카를로비 바리(카를스바트), 카를슈테인 성 등을 건설했으며 상공업을 육성했다. 그의 통치 아래 프라하는 중부 유럽의 교역과 문화 중심지로 번영하여 "황금의 프라하"로 불리게 되었다.[28][48][50]
개인적으로 카를 4세는 당대 유럽 군주들 중에서도 손꼽히는 교양인이었다. 파리에서 교육받고 젊은 시절 이탈리아 문인들과 교류한 경험을 바탕으로 프랑스어, 이탈리아어, 독일어, 체코어, 라틴어 등 5개 국어에 능통했으며, 라틴어로 자서전을 저술하기도 했다.[21] 그는 신학과 법학에 평생 깊은 관심을 보였고, 검소한 생활 태도와 깊은 신앙심, 해박한 고전 지식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다.[24] 그의 프라하 궁정에는 유럽 각지에서 학자와 예술가들이 모여들었으며, 이는 프라하를 초기 인문주의의 중요한 중심지 중 하나로 만들고 보헤미아 고유의 민족 문화가 발전하는 데에도 기여했다.[24] 그는 금인칙서를 통해 선제후의 후계자들이 독일어 외에 라틴어, 이탈리아어, 체코어를 배우도록 권장했지만, 이는 그의 희망 사항으로만 남고 실현되지는 못했다.[17] 역사가 야코프 부르크하르트는 카를 4세가 고대 로마 황제처럼 시인에게 월계관을 수여하는 등 문화적 권위를 중시했으며, 자연 풍경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는 섬세한 감각도 지녔다고 평가했다.[51][52]
그러나 카를 4세의 정책은 룩셈부르크가의 세력 확장과 가문의 영속에 지나치게 집중되었다는 비판도 피하기 어렵다. 그는 황제의 지위를 자신의 가문 세력을 넓히는 데 최대한 활용했으며, 궁극적으로는 룩셈부르크 가문이 황제위를 세습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17][47] 하지만 그의 아들들인 벤첼과 지기스문트는 모두 후계자를 남기지 못했고, 결국 보헤미아 왕위와 신성 로마 황제위는 룩셈부르크 가문의 손을 떠나게 된다. 역설적이게도, 카를 4세가 평생의 경쟁자로 여겼던 합스부르크 가문이 1438년부터 제위를 사실상 세습하며 중앙 유럽의 지배자로 부상하는 데 그의 정책과 행동이 결과적으로 기여한 셈이 되었다.[17][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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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
[29]
기타
[30]
기타
[31]
서적
2003
[32]
기타
[33]
기타
[34]
서적
2003
[35]
기타
[36]
本문
[37]
서적
成瀬(1956)
[38]
서적
世界の名著 45 ブルクハルト
中央公論社
[39]
본문
[40]
서적
佐藤・池上(1997)
[41]
서적
クロニック世界全史
[42]
본문
[43]
본문
[44]
서적
成瀬(1956)
[45]
서적
ロバーツ(2003)
[46]
본문
[47]
서적
菊池(2003)
[48]
본문
[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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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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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世界の名著 45 ブルクハル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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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서적
世界の名著 45 ブルクハルト
中央公論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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